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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 필요성에 따른 견종의 분화 Ⅲ
(사)한국애견협회 심사위원회
2021년 05월 16일

<수렵 필요성에 따른 견종의 분화>

 

()한국애견협회 심사위원 김창영


2) 바람의 질주 시각형 사냥개

중동 지역(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이란 등)과 북아프리카(이집트 등)에는 견공 계의 우사인볼트가 등장했다. 아프카니스탄 등 일부를 뺀 대부분 지역이 평지로, 사슴 종류(가젤, 영양 등)나 토끼 등 빠른 질주능력을 가진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 빠른 개가 지속적으로 선택되었다. 그 결과 그레이하운드, 살루키, 슬루기 등의 형태를 가진 개들이 번성하게 되었다. 그레이하운드의 모습과 유사한 개가 6,000년전 만들어진 파라미드 벽화에 그려져 있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이집트의 왕에게 개는 번영과 보호의 상징이었다.

(그레이하운드와 유사한 모양의 개가 등장하는 이집트의 피라미드 벽화)


죽은 자를 팔에 안고 있는 이집트의 죽음의 신인 아누비스는 몸은 사람이나 머리는 개(또는 쟈칼)의 형상이다. 개별자리인 시리우스의 위치 변화는 나일강의 홍수 시기를 알리는 역할을 했고, 양치기들은 하늘의 그 별을 따라 양떼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할 수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자기의 개가 죽게 되면 자기의 몸과 머리에 난 털들을 모두 깎아 버림으로써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만큼 이집트에서 개는 사람에게 많은 사냥물을 안겨주는 존재였다.

이들은 쐐기 형으로 폭이 좁고 주둥이가 길어진 얼굴을 가지고 있어 머리 무게를 줄였다. 머리가 앞뒤로 길어졌지만 위 아래의 깊이가 줄어들면서 상대적으로 무는 힘이 약해졌다.

그러나 이들이 사냥을 할 대상이 반격을 가할 정도의 전투력이 있지 않기 때문에 악력의 감소는 충분히 감내할만 했다. 길어진 주둥이는 코속의 축축한 비막을 더 넓게 만들기 때문에 코속을 통과하는 습기 많은 공기를 이용하여 달릴 때 상승하는 몸의 체온을 빠르게 냉각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일종의 에어콘 용량을 넓힌 것이다. 또한 이마 면적이 좁아지면서 옆을 향하게 된 양쪽 눈은 시야를 최대한으로 넓혀 사냥동물을 발견하기 용이해졌다. 물론 한쪽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시야는 거리 측정이 되지 않지만, 이들은 동물이 보이기만 하면 거리 측정없이 득달같이 질주한다. 그래서 이들을 시각형 사냥개(Sighthound)라고 부른다.

튕겨 나갈 듯이 날렵하고 힘찬 유선형의 몸에 휘어진 듯한 허리는 뒷다리를 최대한 앞으로 밀어 넣을 수 있어 질주 능력을 강화했다. 앞쪽의 갈비뼈는 길어지면서 폐를 담아낼 수 있는 용적을 넓혔다. 가늘고 길지만 억센 뼈를 가진 다리는 무게를 줄이면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개체별 차이가 있지만 시각형 사냥개의 최대 질주 속도는 시속 70km, 지상에서 치타와 말을 제외하면 그 어떤 동물보다도 빠르다. 그러나 치타는 최대속도 유지시간이 1분 남짓이지만, 시각형 사냥개는 최대속도를 10분 이상 유지할 수 있다. 오로지 모든 것을 질주를 위해 집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빠른 사냥개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번져나갔으며, 평지에서의 사냥 성공률은 주변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이미 2,800년 전부터 지중해 지역을 중심으로 문명이 발달하고, 무역이 성행하였다. 무역은 지중해와 중동은 물론 영국까지도 활발하게 확대되었다. 이들의 뛰어난 항해능력과 함께 돈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거래하는 성향에 의해 금속재료나 유리, 옷감은 물론 시각형 사냥개들도 각지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이 과정에서 살루키, 슬루기, 그레이하운드 등이 번져나갔고, 커다란 체구의 아이리쉬울프하운드, 소형화된 이탈리안 그레이하운드 등도 생겨났다. 과거에 무역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실크로드를 따라 교역의 발달은 계속 이어졌다.

(그레이하운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는 그레이하운드와 같이 매끈한 개들은 물론 거친 털을 가진 시각형 사냥개(아이리쉬울프하운드, 스코티쉬 디어하운드 등)들이 왕과 귀족들에 의해 사랑받았다. 귀족들은 평민들의 요리식단에 귀족의 땅에서 뛰놀던 산토끼들이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평민들이 귀족의 땅에서 개와 총을 이용해 토끼를 잡으면 엄청난 금액의 벌금을 물렸다. 또한 카누트법 1016에 따라 평민들이 빠른 사냥개를 기르면 왕실 삼림 관리인이 평민의 개에게는 무릎의 힘줄을 잘라서 사냥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는 개들의 발가락을 잘라 내기도 하였다. 중앙의 가장 긴 발가락 하나만 잘라내도 빨리 뛰지 못한다는 것을 감안한 것이다.

13세기 영국의 웨일즈 왕자였던 리웰린은 아이리쉬울프하운드와 사냥을 즐겼는데, 한번은 겔러트라는 개가 사냥 도중 갑자기 사라졌다.

(아이리시 울프하운드)


리웰린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피로 얼룩진 갤러트는 주인에게 달려와 기쁘게 껑충껑충 뛰어 올랐다. 놀란 리웰린 왕자는 급히 갓난 아들의 침대로 갔고, 아들의 침대는 비어 있었으며 침대와 바닥은 많은 피가 묻어 있었다. 왕자는 껑충거리며 뛰어 오르는 개를 칼로 찔렀다. 그때 아기의 울음 소리가 들렸고, 울음 소리를 찾아 뒤로 돌아가자 큰 늑대의 시체가 아들 옆에 널부러져 있었다. 그제서야 개가 아들을 공격하려던 늑대를 죽이고 아기를 보호했음을 자랑하려고 자신에게 껑충거리고 뛰어 올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리웰린 왕자는 개의 은혜를 죽음으로 갚은 자신의 잘못에 눈물을 흘리고 갤러트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이 무덤은 비석과 함께 지금도 남아 있다.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온 시각형 사냥개는 많은 곳에서 인기를 얻었다. 카자흐스탄에는 호르타이라는 개가 명성을 떨쳤다. 이 주변에 거주하던 타타르족과 케레이트는 말에 올라타 독수리를 손에 올리고 사냥을 나갔으며, 말 옆에는 호르타이가 따라 다녔다. 그레이하운드와 유사한 모양의 호르타이는 카자흐스탄의 평야를 질주하며 동물들을 쫓았고, 팔 위에 있던 독수리가 날아 마무리를 하는 방식으로 하는 사냥은 전통으로 이어졌다.

(카자흐스탄의 호르타이)


중국이나 몽고에서는 이 그레이하운드의 영향을 받아 가늘고 길다는 뜻에서 세견(細犬)이라는 이름으로 각 지역에서 토착화된 개들이 생겼다. 중국 송나라의 그림에서도 그레이하운드의 모습을 가진 개들이 등장했다.

(그레이하운드와 유사한 중국의 개 그림)


현재의 산둥 세견이나 몽고 세견은 그레이하운드의 영향을 받은 견종들이다.

(몽고세견)

(산둥 세견)


사회적으로 권력을 쥔 왕족이나 귀족들은 빠른 개를 소유하는 것을 평민들과 차별화된 자부심으로 느끼기도 했다.

빠른 개에 대한 욕심은 러시아의 귀족에게까지 번져나갔다. 그러나 그레이하운드와 같이 짧은 털을 가지고서는 추운 러시아의 겨울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긴 털을 가진 장모종의 개(러시안 울프 하운드, 러시안 콜리)를 이용하여 번식함으로써 추위를 이길 수 있는 긴 털을 가진 현재의 보르조이가 탄생하게 된다.


(러시아의 보르조이)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털이 긴 시각형 사냥개는 귀족들의 전유물처럼 취급되었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 시각형 사냥개들의 부귀영화는 사라져 갔지만 몇몇 견종은 구소련에 다시 생겨나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주인의 사회적 신분은 개에게도 이어졌다. 귀족의 개들은 응석받이의 방자한 개가 되었고, 평민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사치품들이 개들을 치장해 주었다. 평민들에게는 그야말로 개만도 못한 삶이 주어졌다. 그리고귀족의 개들보다 못한 가난한 주인을 둔 개들은 음식을 받아먹기 위해 많은 노동을 견뎌내야 했다.

우리나라 속담에 정승의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승이 죽으면 텅텅빈다.’는 말이 있는데, 다른 나라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가장 거창한 개의 장례식은 자칭 미합중국의 황제이자 멕시코의 수호자였던 노튼에 의해 거행되었다. 조슈아 아브라함 노튼은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했던 사업가로 돈을 많이 벌었다가 모두 날린 이후 그 충격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을 잃었다. 자신이 황제라고 믿은 노튼은 1859917일 스스로 미합중국 초대 황제로 취임한다. 엄연히 대통령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일어난 해프닝을 신문사에서 재미 삼아 보도를 했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노튼은 스스로 취임한 이후 하는 일 없이 먹고 놀기만 하는 미 의회의 해산을 결정하는 칙령을 내렸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의 가려움을 긁어주어 화제가 되었다. 또한 교통이 불편한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 사이를 잇는 다리를 놓으라는 칙령도 내렸는데, 이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황제 제복을 입고 있는 노튼의 사진)


노튼은 매일 거리를 돌며 시민과 대화를 나누었다. 인종 차별이 만연한 이유로 폭동이 벌어질 때마다 노튼은 현장을 찾아가 기도를 하였고, 폭동은 거짓말처럼 가라 앉았다.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노튼은 즉시 상호간 적대행위를 중지하라고 촉구하며, 남쪽과 북쪽의 대표지도자에게 샌프란시스코로 출두하라는 소환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물론 양측의 대표는 오지 않았다. 한번은 노튼이 정신이상자로 구속되었는데, 시민들이 무섭게 질타를 하여 견디다 못한 경찰서장이 석방을 하고 사과문까지 발표할 정도로 노튼은 군중들로부터 인심을 얻었다. 그의 황제 제복이 낡으면 지방정부가 그에게 새로운 제복을 제공했다. 노튼에게는 신하(사실은 개) 둘이 있었는데, 이 개들의 인기도 덩달아 올라갔다. 노튼의 '신하 바머'가 죽었을 때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함께 애도해 주었다. 또한 노튼의 다른 개인 신하 라자라스가 죽자, 이번에는 만 명 이상의 군중이 모여 죽음을 애도하였다. 노튼은 188018일 길거리에서 갑자기 쓰러져 죽었다. 그 다음날 신문들은 일제히 "The King is Dead" (황제가 승하하셨다).라며 그의 죽음을 알렸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민들이 3만명 이상 모여들었으며, 그 행렬의 길이는 3킬로미터가 넘었다고 한다. 스스로 황제로 즉위한 후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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